이재석: 창끝의 궤적

12 January - 25 February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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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라는 단어는 사인(Sign), 즉 영문으로 활용될 때 보다 즉각적으로 우리의 인식 체계에 수용된다. 사인은 특정한 약속 체계 안에서 동작, 이미지 또는 알파벳, 숫자 등의 문자 체계가 그에 상응하는 행동 또는 의미와 연계되는 구조인데 각 문화권, 시대 및 지역, 사회 및 각종 집단마다 수많은 종류의 사인과 그 아종, 변종이 존재한다. 기호에 있어 등가적 가치를 규정하는 약속 체계의 존재 여부는 중요한 선결 조건이며, 대부분 그러한 체계는 특정한 그룹 또는 계층에 의해 배타성을 띠며 발전, 고착되어 왔다.

 

이재석의 작품에 등장하는 기호의 존재와 그 함의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은 그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한 지름길이다. 군 복무 기간 중의 경험이 잘 용해되어 있는 그의 초기작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기호들은,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이 지향하는 이상에 부합하기 위한 여타의 수단들과 그것들이 일사불란하게 작동하는 이상향을 위해 존재하는 기계, 물품 및 한시적으로 구속된 인간들에 작가가 도식적으로 붙인 '제2의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작명에도 권력관계가 존재하는데, 이는 이차원 평면 그 자체로 완결된 미디엄인 페인팅의 장르적 특성상, 작가의 부가 설명 없이는 관람자에게 약속 체계가 공유될 수 있는 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치는 작품에 등장하는 기호의 모티브가 군대라는 폐쇄적인 기관에서 연유함과 맥락이 맞닿아 있다. 결국, 관람객들은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발견 전 이집트 상형문자를 연구하던 초창기 고고학자의 난해함에 동참하게 되나, 동시에 이러한 비명료성은 이미지를 훑고 지나가는 각자의 시선에 다양한 해석과 궁금증을 더하는 촉매제이자, 단일한 해석을 막아 그 신비로움을 봉인한다.

 

챕터투의 전시, 《창끝의 궤적(Trajectory of the Spearhead)》에서 또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창작의 공간적 스테이징이 우주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보다 큰 무대로 옮겨왔음이다. 화면의 상부에 빈번히 등장하는 오라(Aura)에 둘러싸인 흑백의 검은 구체는 묘사된 풍경과 이미지들이 일반적인 물리 현상 아래 놓여 있음을 환기시킨다. 한 치의 과장 없이 정교하게 차용된 풍경은 그 시각적 익숙함으로 인해, 빈 여백을 능가하는 정숙함을 화면에 불어넣는다. 마치, 고전 회화에서 배경이 담당했던 묘사 대상과 이벤트의 사실성을 담보하는 기능이 이식된 듯한 화면은, 나열된 무생물들의 향연이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돕는다. 

 

윈도우에 설치된 대형 작품인 <시간의 경계선(Boundary of Time)>(2022)은 이재석의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함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창끝은 여지없이 상부를 향하며 발광하는 구체를 육박하듯 서 있고, 몸체 곳곳을 꿰뚫려 고정되어 있는 흰 천은 부유하듯 움직이나 의지에 반하게 속박되어 있는듯하다. 속박의 주체인 창은 로프로 지면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화면 전반의 역학 관계를 주도하는 체제로, 흰 천은 중력을 거스르며 떠오르고자 하는 미지의 대상으로 한때 고정되어 있다가 점차 풀어져 가며 저항하는 구도를 보여준다. 이는, 초창기 창작의 토대였던 군대에서의 경험이 제공하던 명확한 수직적 하이어라키(Hierarchy)에서 보다 진일보하여, 창(구속)과 움직임(탈수단화)이라는 차원 높은 이분법적 언어를 수용하며 작업 전반에 보편성을 불어 넣는 시도로 보여진다. 결국 창끝의 궤적이 향하는 곳엔 계와 계가 대립하고 상전이의 가능성과 엔트로피의 변화하는 지점이며, 일상에서 여러 형태로 매일 목격하는 광경이다.

 

이재석(b.1989)은 목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미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갤러리바톤(2023), 서울시립미술관 SeMA 창고(2021)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갤러리바톤(2023),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2022), 서울대학교미술관(2022), 이천시립월전미술관(2021), 스페이스K(2020), 대전시립미술관(2019),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2018) 등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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