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성: 롱 트립
이의성의 관심사는 우리 각자의 삶이 '노동'을 매개로 어떻게 복잡다단한 사회구조와 연결되어 왔고, 미술이 그러한 시스템에 어떻게 반문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가이다. 비미술적 재료를 사용한 작품과 전시 방식은 다다이즘의 수혜를 엿보이며 작가의 주된 의문을 위트 있게 관람자에게 전달한다.
이의성(b.1982)은 인하대학교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글래스고 예술학교(The Glasgow School of Art)에서 순수미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2019), 인사미술공간(2017)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위상공간(2022), 챕터투(2022), 갤러리바톤(2022), 쇼앤텔(2021), 전북도립미술관(2020), 우민아트센터(2019), 송은아트스페이스(2018) 등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여했으며, 제18회 송은미술대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의성 작가노트 - 'Long Trip' (2023) 발췌
선반에서 머그잔을 꺼내자 주변을 날아가던 벌레 하나가 입구에 앉는다. 담은 것이 없는데 굳이 안쪽까지 한참을 훑어보고 나서야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이유는 뭘까. 컵 안을 확인하는 벌레의 행동도 의아하지만 빈 컵인 줄 알면서 재차 들여다보는 나 역시 이해가 안 가긴 마찬가지다. 컵 속의 오목함에 속은 건지 벌레의 강박에 설득당한 건지 모르겠지만, 빨래하기 전에 빈 주머니를 확인해 보는 나의 습관과 빈 컵을 살피던 벌레의 습성이 뭐가 그렇게 다르겠는가.
사물과 공간 그리고 자연은 오목하게 들어간 형상과 표면 위에 높은 확률로 무언가 담아내곤 한다. 마르고 편평한 땅일지라도 비가 오면 웅덩이지는 곳이 생기듯 물질이 개입하면 보이지 않던 굴곡이 보인다. 처음엔 미세한 기공을 따라 수분을 빨아들이다가 이내 지면의 깊이를 드러내며 빗물을 담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과육과 쌀알이 껍질 안쪽에 자리하듯 물질로 치환된 에너지의 많은 부분들이 오목함에 담겨있거나 스쳐 지나간다. 이는 날아가던 벌레의 길목에 내려놓은 빈 잔이 기존의 경로를 좀 더 복잡한 곡선의 경로로 늘려 놓았던 앞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마치 빛이 질량(중력)이 휘어 놓은 공간을 따라 그 경로가 휘어질 듯이 공간과 사물이 담아내는 가능성의 굴곡(표면)이 우리에게 어떤 경로로 움직여야 할지를 말해 준 것이다.
사물이 공간의 일부가 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공간의 표면으로써 권리를 갖게 된다. 현관문의 충격에 같이 떨리고(진동하고) 히터의 열과 공기 중의 수분도 조금씩 머금는다. 심지어 집을 처음 보러 왔을 때 울리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걸 보면 내가 채워 넣은 사물들은 각자의 주머니에 이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고 있던 것이다. 이렇게 공간의 지분을 나눠 갖은 사물들은 작고 사소하지만 저마다 물질과 에너지를 끌어당기고 있으니 사물이 자리한 공간의 표면은 각양각색의 중력들이 매만진 굴곡진 풍경이 된다. 벌레에게 평범하게 흘러간 컵 안의 시간이 나에게는 ‘한참’의 기다림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우리가 서로 다른 시간의 굴곡(사물의 표면) 위에 서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전시 《Long Trip(롱 트립)》은 서로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상대성을 물질과 에너지의 여정으로 그려낸다. 작업실 내부의 시간이 외부 현실의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뒤늦게 알아채는 현재의 시간을 단초로 위치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물리적 혹은 심리적인 시간의 격차를 조각의 틀과 표면에 축적된 시간의 껍질로 담아낸다.
작품 에서 스티로폼 박스로 포장된 운송체가 실어 나르는 대상은 냉동 참치들이다. 마트에 가보면 얼린 식품은 동일한 신선 혹은 냉장식품에 비하여 값어치가 떨어지기 마련인데 하나의 예외가 참치다. 이들은 먼바다에서 잡자마자 부패하기 쉬운 내장과 아가미가 제거된 채로 영하 60도의 급속냉동기에 들어가 6~12개월 정도 걸려서 육지로 들어온다. 거리와 시간을 초월해 도착한 참치는 수개월의 시간이 축적된 얼음 껍질을 입은 채로 하적된다. 영하의 온도가 참치의 표면은 팽창시키고 시간은 지연시키는데 이 표면의 부피와 무게는 그간 투입된 에너지의 고체화된 형태이자 시간의 껍질이 되는 셈이다.
참치의 표면의 부피가 클수록 이를 포장하는 스티로폼 박스의 내부 표면적이 커진다는 사실로부터 작업에서 해동된 참치의 표면과 박스 내부의 표면 사이의 거리는 안과 밖의 시간의 격차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내부의 시공간을 펼쳐놓은 세 개의 스티로폼 박스는 참치의 표면의 두께에 비례하여 격자의 깊이는 깊다. 격자에 채워진 실리콘 줄눈은 깊이에 따라 늘어나는 정도(중력의 크기)가 커지고 이에 맞춰 내부의 시간이 외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천천히 흐르고 있음을 단계적으로 구현해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