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서 보고 있는 것: 권용주, 김범, 정희승, 홍장오
본다는 것은 첨예한 문제이다. 각자의 '시선'은 자율적인 신체 기관과 감각 기관에 의해 통제되고 자율성의 기초가 되는 '자기만의 인식 체계'를 끊임 없이 가동하고 보정하며 축적한다. 이러한 주체적인 봄이 개인의 유일성을 담보하고 있음을 상정할 때, 초집약-초연결을 지향하는 현대 사회의 발전 단계는 이러한 현대인들의 주체적인 '시선'을 점진적으로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해 왔다. 바라봄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와 물체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제한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자율적으로 이미지를 인식하고 처리하는 기능의 출발점이 망막에서부터 신체 안에서만 제한적으로만 작동한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본다는 행위에서 더 이상 개인의 주체성이 온전히 발휘되지 않음을 뜻한다.
예를 들어, 하루 종일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개인의 경우 산업 표준, 안전 인증 등 다양하고 구체적인 룰에 의해 건설되고 운영되는 빌딩, 도로, 교통기관, 사무실, 아파트, 식당, 커피숍 등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여기서 우리의 시선은 이러한 룰의 테두리와 사회 시스템에 수용되는 범위 안에서 온전히 자신의 안온한 하루를 보장 받기 위해 수동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도 IT 기술의 발달로 무한정의 디지털 이미지에 접근할 수 있는 일종의 해방구가 있긴 하지만, 자칫 수동적인 구경꾼이 되기 십상이다.
푸코 (Michel Foucault, 1926 - 1984)는 그의 대표적 저서 “감시와 처벌 (1975)”에서 "생산과 효율의 증대 및 규격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는 ‘원형 감옥식 억압 구조’라고 명명된 기하학적 조직화된 사회 구조가 보편화 되도록 작용하여 왔음"을 논평하며, 이러한 현상의 도래와 심화를 예견하였다.
매스미디어는 이러한 획일화되고 스팩터클한 사회의 구축에 동원되었으나 후일에는 자발적으로 이러한 현상을 끊임 없이 공고히 하는 주체로 격상되는데, 기술의 발달에 기반한 유비쿼터스적인 무한정 재생과 반복, 공공과 상업의 무절제한 혼용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규정하고, 유일성을 약화시키며 자아의 지위를 잠식해 왔다. 다시 말해, 삼라만상에 대한 우리의 즉각적인 반응과 심상의 형성은 연결되어 있는 사회가 작용해온 양상 (가치 체계, 규범, 생활 방식)에 상당 부분 의지하게 된다. 특정 사안과 물체에 대해 남과 나를 구분해 주는 주체적 사고의 뿌리는 사실 아주 독립적인 토양에 기거함이 아닌, 매스 미디어로부터 공통으로 주어진 정보에서 개인의 특성에 따른 편취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고, 미디어의 득세는 이러한 각 개인의 사고간의 차별성이 줄어듦과 동시에 특정 반응과 판단의 과점화를 심화 시키게 된다.
이번 전시는 광범위하게 타자에 의해 형성된 우리의 선입견과 사고 체계를, 김범, 홍장오, 정희승, 권용주 등 4명의 작가가 선사하는 '창(窓)'을 통해 비평적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비정형적인 물성과 외향을 지닌 혹은 상식의 범주를 아슬아슬하게 침범하는 형태로 등장하는 비범한 작품들은 기존의 가치 체계에서의 일률적 해석을 거부하고 관람자로 하여금 각자의 고유한 사고 체계를 작동 시키도록 독려한다. 비록, 이러한 사고 체계는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획일적으로 학습된 누적 정보에 기댈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님에도, 관람자 각자에게 작품에 스며있는 알레고리에 기반한 수 많은 변주와 해석을 이끌어 내는 기회가 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작가의 의도를 유추함으로 각자의 인식의 지평을 한 차원 고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