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조 반복고리: 기슬기, 이덕영, 최해리, 황형신
챕터투는 2024년 8월 30일(금)부터 9월 28일(토)까지 연남동 전시공간에서 4명의 국내 작가 — 기슬기(Ki Seul Ki, b.1983), 이덕영(Lee Deok Young, b.1990), 최해리(Choi Hae Ri, b.1978), 황형신(Hwang Hyung Shin, b.1981) — 이 참여하는 그룹전, 《Dummy Loop(모조 반복고리)》를 개최한다.
2004년 개축된 뉴욕 현대미술관(MoMA NY)의 건축가로 유명한 요시오 타니구치(Yoshio Taniguchi, b. 1937)는 현대적 미술 공간의 이상적인 기능성에 대한 통찰을 내포한 “나에게 더 많은 예산이 허락된다면, 미술관을 사라지게 하겠다(If you raise the budget, I will make the building disappear.)”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다. 그의 언급은 예산의 구애됨이 없이 건축에서 허용되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을 추구할 수 있다면, 공간의 불필요한 간섭 없이 예술과 사람 간의 접점을 극대화하겠다는 그의 이상주의적인 믿음에 기인한다.
미술관을 지칭하는 “White Cube”도 작품을 전시한다는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크고 하얀 벽에 둘러싸인 텅 빈 공간”을 뜻하는데, 앞서 언급한 건축가의 사례와 같이 미술 관람에 최적인 공간이 갖추어야 하는 기능성에 대한 함축적인 정의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현대 미술 공간이 최적의 관람 환경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저변에는 물론 바쁘고 복잡한 외부 세계와 의도적으로 단절시켜 공간 자체에 위계와 권위를 불어 넣으려는 의도도 있지만, 현대미술이 다양한 장르와 시대를 거쳐오며 다원화되고 사변성을 띠게 된 이유도 한 몫 한다. 바야흐로 미술도 온 감각과 집중력을 동원하여 작가의 출신 배경과 작품에 주입된 다양한 경험과 상념, 감정의 상호작용을 분석해 보고 이해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전시 공간의 변모는 일찍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전시 제목인 《Dummy Loop(모조 반복고리)》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의도적으로 프로그램의 속도를 지연시키기 위해 특정 작업을 수행하지 않고 단순히 반복만 하는 루프를 뜻한다. 기슬기, 이덕영, 최해리 작가와 황형신 가구 디자이너가 협업한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들의 작업에 부여한 의도적인 복잡성과 모호함을 적극 수용하며 이에 권장되는 관람의 태도를 우회적으로 함축하기 위하여 쓰였다. 즉, 기획 의도와 같이 관람자가 마치 더미 루프가 작동되는 프로그램처럼 신중한 자세로 한 작품 한 작품에 의도적으로 충분한 시간을 할애한다면, 불현듯 작업이 내포한 본질적인 메시지와 작가의 의도에 보다 다가갈 수 있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서두에 인용한 타니구치를 포함, 여러 선구적인 공간 설계자들이 궁극적으로 조성하려고 했던 이상향적 공간의 구현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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